이재우, 장 보드리야르: 기호의 장벽과 상징의 저항, 철학의 탈주



보드리야르는 내파가 된 현실에서 이제 기호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절대 권력, 절대 가치는 없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계속적인 권력의 역전, 가치의 역전이다. 이것이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로 불리는 이유인 것이다. 이제 보드리야르는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보드리야르에게 이제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제 더 이상 깨어질 거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현실적 개입은 이제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투명한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허무주의는 더 이상 세기말적인, 음울하고, 바그너적이며, 슈펭글러적이고 음침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더 이상 퇴폐주의의 세계관으로부터도, 신의 죽음으로부터 온 급진적인 형이상학과 그로부터 이끌어 내온 모든 결과들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오늘날 투명성의 허무주의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앞섰던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위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명성, 이러한 부유는 해소 불가능한 체계의 투명성, 그리고 이 체계를 분석하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의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하이퍼 리얼리티에서 세상의 물질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수행의 가장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것들을 알아볼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신이 없다.({시뮬라시옹})

물음표 이미지
물음표라는 기호에 상징하는 의미는 @ Image by Arek Socha from Pixabay


허무주의는 이제 현실이다. 이 시기는 어떠한 운동, 어떠한 사상에 의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너질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계속적으로 기호의 공간을 확장해 나갈 뿐이다. 그리고 모든 의미는 함멸되어 버렸다. 유혹만이 도처에 떠다니고 있다. 이제 우리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하나의 극단적인 해답을 보드리야르의 현재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기존의 질서(기호)에 대항하는 상징적 운동을 한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듯 소비하는 기호들뿐이다. 그들의 소비에는 어떠한 선험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가 부여해 준 의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호들 자체가 흔들리고 변화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 이 파괴 속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허무주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야기했듯이 암울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판단한 현재의 상태이고 그것을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다. (……) 우리는 한 번 빠진 기호적 의미체계 속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계속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암울함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호체계 속에서 계속적으로 상징적 저항을 하고 있으며 그 저항에 의해서 기호체계는 그 형태를 확대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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